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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강준만의 쓴소리: '고교평준화 죽이기'
작성자 : 최고관리자 등록일시 : 2008-05-09 14:1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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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만의 쓴소리: '고교평준화 죽이기'

한국일보 2004.02.02
강준만·전북대 신방과 교수

최근 서울대 사회과학연구원은 고소득층 자녀들이 서울대에 많이 들어간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냈다. 그런데 이 보고서는 그 책임을 고교 평준화에 돌리고 있으며, 일부 보수 신문은 과장을 일삼으며 ‘평준화 죽이기’ 캠페인을 전개하고 나섰다.
그런 주장의 전제는 서울대 입학이 계층 상승의 유력한 수단이라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어느 대학에 들어가건, 아니 대학 진학을 하지 않더라도, 각자 얼마나 노력하느냐에 따라 계층 상승의 기회가 열려있는 사회가 바람직하다는 데에 동의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서울대 보고서를 놓고 우리가 고민해야 할 것은 자명하다. 10대 후반에 한번 치르는 경쟁으로 결정되는 대학의 간판이 계층 상승의 기회에 미치는 절대적 영향력을 약화시켜 나가야 한다. 그게 바로 ‘학벌 타파’다. 그리고 20대와 30대에도 각자 노력하기에 따라 새로운 기회를 얻을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물론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언론에 거는 기대가 크다. 그런데 그런 고민은 전혀 하지 않은 채 ‘서울대 패권주의’라고 하는 기존 시스템을 긍정하면서 서울대가 ‘부자들의 대학’으로 변해가고 있는 책임을 평준화에 돌리는 게 과연 언론이 할 일인가?

평준화를 폐지하면 가난한 집안의 학생들이 서울대에 지금보다 더 많이 들어갈 수 있다는 주장도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소리다. 이 지구상에서 최악의 학벌주의를 자랑하는 한국의 현실에서 서울대 입학은 경쟁이라기보다는 전쟁이다. 서울대 프리미엄이 워낙 크기 때문이다.

시간이 갈수록 누적 효과로 인해 그 프리미엄은 더욱 커지고 있다. 이걸 무시하고 평준화 이전과 이후를 단순 비교하는 건 어리석다. 그 프리미엄을 온존시킨 가운데 그 어떤 제도적 변화를 모색한다 해도 달라질 건 없다. 군자금이 많은 쪽이 반드시 유리하게 돼 있다.

한국의 학벌주의는 날로 심해져가는 빈부격차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로 작동하고 있다. 가난하게 살더라도 세상 탓 하지 말고 자신이 실력 없는 탓을 하라는 게 바로 학벌주의의 메시지다.

순하기 이를 데 없는 한국인들이 잘못된 시스템을 바꾸려 하기보다는 개인과 가족의 차원에서 그 시스템에 순응하려고 발버둥을 치는 걸 더 이상 악용하면 안된다.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건데, 그 누구도 억울하지 않게끔 시스템 교정에 앞장서는 게 언론이 할 일 아닌가.

서울대 보고서를 ‘평준화 죽이기’의 도구로 이용하더라도 거짓말에 가까운 ‘뻥튀기’는 자제하는 게 좋겠다. 조선일보 1월 26일자 사설 ‘평준화란 사이비(似而非) 종교에서 깨어나라’와 27일자 사설 ‘가난한 집 자녀만 멍들게 한 평준화’가 바로 그런 경우다.

이 신문은 평준화 찬성론자에게 ‘궤변’이니 ‘죄악’이니 하는 독설을 퍼붓는 호전성을 보이면서, 평준화가 청소년들의 “자기 실현의 꿈을 앗아가고 있다”는 무시무시한 주장을 하고 있다.

평준화의 근거는 ‘철지난 맹목적 사회주의 이념’이라는 주장도 놀랍거니와, 평준화로 인해 ‘상승의 통로가 봉쇄돼버린 사회에서 자라는 것은 좌절과 증오와 자포자기라는 독버섯뿐’이라는 주장 앞에선 두 손을 들지 않을 수 없다. 세상이 아무리 미쳐 돌아가도 신문만큼은 최소한의 이성을 갖는 게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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